[판결문 전면공개를 향하여] ② 판결문 이름-지명 A, B, C 넘어 AA, AB, AC 등으로 표시
[ 신 년 기 획 ]
판결문 전면 공개를 향하여
① 왜 전면 공개인가
② 암호문같은 비실명 판결문
③ 선진국은 어떻게 하나
④ 공개 실질화 방안과 대책
“우연히 제가 작성한 판결문이 비실명화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작성했는데도 무슨 뜻인지 전혀 식별하기 어렵더군요. 비실명화인지, 암호화인지 의아할 정도였습니다.”
이른바 ‘사회적 이슈’가 됐던 판결을 내렸던 현직 부장판사의 말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법원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판결문을 열람하다보면 이런 상황에 자주 맞닥뜨린다. 비실명화 작업이 과도하게 이뤄져 누가 누군지, 뭐가뭔지 도통 알아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이에 비해 미국 연방대법원은 홈페이지와 연방정부인쇄국 홈페이지 등을 통해 선고된 사건의 판결문을 전면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 비록 배심제라는 법률문화의 차이는 있지만 사건별로 소송관계인의 이름뿐만 아니라, 소송과정에서 법원에 제출된 소송기록을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법조계에서는 판결문 공개 범위 확대를 넘어 공소장 등 소송기록 확대를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AA부터 AZ까지… ‘암호같은 비실명화’
판결문을 보다 보면 원·피고가 각각 1명인 사건도 있지만, 각각 여러명인 경우도 있다. 사건관계인이 여러명 등장하는 사건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법원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이런 사건에 대한 판결문 열람을 신청하면, 비실명화 작업이 이뤄져 판결문상 이름이나 지명 등이 A, B, C, D를 넘어 AA, AB, AC, AD 등으로 전환된다. 특히 개인정보 침해의 우려가 가장 큰 개인 이름이나 회사명뿐만 아니라 큰 단위의 지명이나 고유명사로 보이는 부분 등에 대해서도 과도하게 비실명화 작업이 이뤄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판결문을 읽는 것 자체가 고역일 때가 많다는 하소연이 나오는 배경이다.
여기에다 1심 판결 선고 이후 항소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다수 피고인 중 일부가 항소하지 않는 경우에는 새로운 A, B, C, D 순서의 비실명화 작업이 이뤄진다. 이 경우 1심과 2심 비실명 판결문에서 지칭하는 C 씨가 서로 다른 인물이 된다.
이인환(42·변호사시험 3회) 법무법인 제하 변호사는 “최근 게임 아이템 관련 사건의 판결문을 열람했을 때 아이템에 따라 그 가치가 다른데, 모두 다 비실명화하니 어떻게 구분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있었다”며 “특수한 상품명이나 아이템 등은 구분돼야 판결의 의미까지 알 수 있는데, 그 부분까지 비실명화가 되다보니 판결문을 봐도 법리 파악이 어려웠다”고 말했다. 이어 “보호해야 할 개인 정보는 보호하면서도 판결문 공개를 확대하는 쪽이 법리 파악 등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법원 안팎 “소송기록 공개도 고려해야”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판결문만 봐서는 왜 이런 판시가 나왔는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은데, 서면이나 소송 기록을 보면 단숨에 이해된다”며 “필요한 경우 소송기록을 공개한다면 법관의 판단을 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은정(51·사법연수원 33기) 변호사는 “성년후견 사건의 경우 조사보고서 열람이 불가능하고, 형사 사건에서 검경이 어떤 근거로 영장을 청구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어 피의자 변호가 어려울 때가 있다”며 “외국의 중재판결문을 보면 진행 과정에 대해 상세히 정리돼 있어 명확한 쟁점 파악이 가능한데 비록 개인정보 침해의 우려가 있는 대목은 지우더라도 소송기록 공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여전히 깜깜이로 남아있는 공소장도 문제로 거론된다. 2020년 2월 법무부는 청와대의 울산시장 하명수사 및 선거 개입 의혹 사건과 관련해 공소장을 제출하라는 국회의 요구에 기존 관행과 달리 공소 요지만 간단히 정리해 제출했다. 참여정부 때인 2005년 5월부터 법무부가 주요 사건 공소장을 국회에 제출하면 공개해 왔는데 법무부가 갑자기 비공개로 전환하면서 논란이 벌어졌다. 당시 추미애 장관은 “국민의 공개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침해되고, 형사절차에 있어서 여러 가지 기본권이 침해되는 일이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법무부의 공소장 비공개를 납득하기 어렵다고 반발했다.
김영규(58·24기) 변호사는 “구속영장의 경우 수사단계에서의 기밀성 유지가 고려돼야 하기 때문에 달리 볼 수 있겠지만, 공소장 등에 대해선 중요 사건의 경우 국민의 알권리가 더 클 수 있다”며 “공소장이 공개된다면 검찰에서 공소제기할 때 더 신중하게 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고 밝혔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모든 재판은 공개가 원칙이고, 공소사실은 재판정에서 다 공개되는 것”이라며 “피의사실공표 우려를 이유로 ‘공인’ 관련 사건까지 깜깜이로 진행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박수연·한수현·이용경 기자>